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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문학평론가 정상진 “고려인 문학

작성자최고관리자작성일2007-06-24 00:00:00조회5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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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70주년을 맞아 내한한 정상진씨(왼쪽)과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송라브렌티씨가 14일 강제이주 당시와 이후 고려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박재찬기자

 

 

 

“강제이주에 대해서 누구라도 알고 있지만 사실 강제이주라는 처참하고 비참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개념이 희미할 것입니다. 현재 강제이주를 직접 겪은 사람 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90살 먹은 나 같은 사람이 직접 와서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습니다.”

15일 홍익대에서 열린 ‘고려인 강제 이주 70주년 학술대회’에 강연자로 초청돼 방한한 정상진씨(89)는 이날 오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참석의 변을 밝혔다.

‘1918,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난 정씨는 37년 9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뒤 삶이 180도로 바뀌었다. 당시 말과 소를 운반하는 화물 열차에 실려간 20만명의 고려인이 모두 그랬다.

“강제이주 후 고려인들은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아무 권리도 없는 백성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는 이곳에서만 살아라’라고 제한을 당했습니다. 군대에 가고 싶었지만 허락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45년 3월에 군사동원부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가서 태평양함대 해병대원이 됐습니다. 북한의 운기, 나진, 청진, 원산 등에서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한 일 중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건 이 전투들입니다.”

이후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라는 명령에 따라 북한에 남게 된 정씨는 원산시 교육부장, 함경남도 교육처장 등을 거쳐 52년 북한 문화선전부 부부장(차관급)으로 임명됐다. 당시 부총리였던 벽초 홍명희 아래에서 일했다. “당시 홍명희, 한설야 선생 등과 가까웠습니다. 아쉬운 것은 월북한 홍선생이 창작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벽초는 무척 착한 분이었고 잡다한 이야기를 잘 하셔서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북한의 소련파 숙청으로 58년 카자흐스탄에 망명한 이후 ‘고려일보’기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온 정씨는 작금의 고려인 문학이 처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구소련 지역에서 한국어로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은 저하고 이정희·문경자씨 등 5명밖에 없습니다. 모두 60세가 넘은 사람이에요. 이 사람들이 세상을 뜨면 한글을 쓸 사람이 없습니다. 또 후손들이 한글을 모르니 문학작품을 써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송라브렌티씨(66)의 처지는 좀 나은 편이다.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송씨는 고려인 2세대로 영화감독이자 연극연출가. 한국말은 어눌하지만 86년부터 ‘후룬제 실험농장’ ‘고려사람’ ‘교장선생’ ‘숙달된 경제’ 등 수 편의 기록영화를 통해 고려인의 이산을 깊이 있게 다뤄왔다. 연극연출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그는 고려인 강제이주 외에도 소수민족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여러 편 찍어 국제영화제에서 수상도 했다.

“57년 복권되기 전까지, 고려인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상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 해주고 싶어 영화를 찍었습니다.”

정씨는 옆에서 “강제이주를 주도한 스탈린이 죽고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고 난 뒤에야 고려인의 강제이주를 말하는 것이 자유로워졌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최근 카자흐스탄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 높아지는 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고려인들을 잊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여러 대학과 기관 강연을 통해 강제이주의 역사를 알리고 21일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다.